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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

관료주의적인 잔혹성과 타성이 만들어 낸 사태(story of bureaucratic cruelty and inertia)

by 신기황 2024.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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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일 방영된 영국   ITV   드라마 ‘미스터 베이츠 대 우정청’의 한 장면. 횡령 혐의 등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우체국장들이 법정에서 자신들의 무고를 입증한 실제 사건을 다뤘다.   photo   ITV



현재 영국에서는 드라마 한 편이 일으킨 후폭풍이 상당하다. 영국 민간 TV 방송 ITV가 지난 1월 1일 방영한 '미스터 베이츠 대 우정청(Mr. Bates vs Post Office)'이라는 총 4시간짜리 4부작 미니시리즈가 일으킨 후폭풍이다. 영국에서는 1999년부터 2015년 사이 우정청이 983명의 우체국장과 직원들을 횡령과 사기, 회계부정 등의 혐의로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유죄를 받은 555명의 우체국장들이 우정청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2019년 극적으로 승소한 스토리를 극화한 드라마이다. 사실 드라마 형식을 띠긴 했지만 사실만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평범한 시골 우체국장이 거대한 국영기업을 상대로 영웅적인 투쟁을 벌여 결국 승리를 이끌어내는 드라마가 일반 시청자들은 감동시켰다.

 

우체국장들의 법정 승리 드라마

 


영국 우정청(Post Office Limited)은 100% 영국 정부 소유의 공기업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한 1만1500개의 우체국을 관장하고 있다. 영국 우체국 중 99%는 우정청에서 허가를 받아 운영되는 프랜차이즈 형태의 개인사업체이다. 우체국은 우정청의 업무를 대행 처리해 주고 월급과 수수료를 받는데 업장에서 생필품을 팔아 과외 수입도 얻는 반관반민 사업체이다. 은행 지점이 없는 시골 마을에서 은행 역할을 하면서 노령연금과 실업수당을 비롯해 각종 수당을 지불하는 등 마을의 사랑방 역할도 한다.

그런 우체국장들이 회계부정을 해서 거액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1999년부터 2015년 사이 대규모로 형사기소됐다. 영국에는 개인이나 기관이 검찰을 통하지 않고 직접 형사소송을 제기하는 사인기소(private prosecution) 제도가 있다. 작은 마을 유지로 사랑받고 존경받던 수많은 우체국장들이 유죄를 선고받은 사건은 당시 영국 사회에 대단한 충격을 던졌다. 재판 결과 우체국장 983명이 유죄를 선고받았고, 그중 236명은 투옥까지 됐다.

문제의 시작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당시까지 서류로만 관리되던 우체국 시스템을 온라인화해서 전자단말기(EPOSS)를 통해 거래하게 만들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본 후지쓰가 개발한 호라이즌(Horizon) 운영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겨 시스템상 금액과 현금 시재에 차이가 빈번하게 발생한 것이다. 전적으로 프로그램의 버그, 오류 및 결함 등이 일으킨 문제지 우체국 운영을 책임진 우체국장들의 횡령이나 경리부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상은 거의 20년도 더 걸려서 밝혀졌다. 뒤늦게 진상이 밝혀진 그 사태를 ITV가 '미스터 베이츠 대 우정청'이라는 재판 이름을 제목으로 달아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문제는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되는 등 무고한 우체국장들의 삶이 완벽하게 회복 불가능하게 무너졌다는 데 있었다. 우체국장들은 프로그램 오류가 만들어낸 현금 시재 부족 금액을 우정청과의 계약에 의해 무조건 메워 놓아야 했다. 금액이 주머닛돈을 털어넣을 수준이 아니어서 결국 집을 판 경우도 생겼고 우체국을 뺏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혼으로 가정이 해체되는 것은 물론 파산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로 길거리에 나앉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보다 더한 고통은 동네 노인들이 갖다 맡긴 예금에 손을 댄 파렴치한 범죄자 낙인이었다. 유죄판결을 받은 우체국장들 상당수가 파산은 물론 이혼, 정신병, 음주, 마약, 투병 등으로 삶이 파괴되었다.

영국의 우체국은 99%가 우정청에서 허가받아 운영되는 프랜차이즈 형태의 개인사업체다.   photo   The   Gaurdian



컴퓨터 오류가 불러온 현금 횡령 혐의



당시만 해도 세상은 컴퓨터가 오류를 일으킨다는 생각은 할 수 없던 때였다. 해서 우체국장들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호소를 해도 다들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그렇게 우체국장들은 20년간 하루하루를 고통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미스터 베이츠 대 우정청'의 주인공은 웨일스 시골 크레이크 이 돈이라는 시골마을의 우체국장 알란 베이츠다. 그는 1998년 3월부터 2003년 11월까지 계속 시스템 문제를 우정청에 보고했다. 물론 그 사이에 나타나는 현금 시재 부족은 사재를 털어넣으면서 버텼다.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베이츠는 2003년 시스템의 문제를 우정청이 바로잡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시재 메우기를 더는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계약이 종료되어 우체국 문도 닫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법권을 가진 우정청 본청 감사직원들이 들이닥쳐 범죄자 취급을 하면서 부족한 현금을 횡령한 이유를 밝히라고 다그치고 재산 압류를 협박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베이츠는 2004년 컴퓨터 전문 주간잡지 '컴퓨터위클리'에 호라이즌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제보했다. 컴퓨터위클리는 5년간 차근차근 취재를 진행해 2009년 5월 기사를 게재했고 바로 이어서 영국 최고의 정치 시사문제 가십지인 '프라이빗아이(Private Eys)'도 이 문제를 다루었다. 아직도 발행부수 25만부를 자랑하는 주요 언론이 이 문제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자 베이츠는 직접 캠페인에 나섰다. 2009년 9월 '우체국장들의 정의동맹(JFSA)'을 결성하고 자신들의 오랜 신원(伸冤)을 알리는 활동을 펼쳐나간다.

그러던 중 우체국장 중 한 명인 리 캐슬턴이 현금 부족이 자신의 오류가 아니고 시스템의 문제라는 확신하에 우정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정청은 시스템 문제를 해결하라고 90여번의 전화를 걸어온 캐슬턴을 상대로 이번에는 민사소송을 벌였다. 재판에서 캐슬턴은 시스템 오류라는 객관적 증거를 제출하지 못해 2007년 1월 패소했다. 법원은 현금 부족분 2만5000파운드와 우정청 법정소송 비용 32만1000파운드를 포함해 도합 34만6000파운드(약 5억8800만원)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캐슬턴은 개인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금액은 당시 영국 평균 단독주택 3채 값이었다.

그러던 중 다른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어왔다. 유명 탐사보도 작가인 닉 왈리스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왈리스는 2010년 택시를 탔다가 운전기사로부터 자신의 부인이 우체국 사태로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 취재를 하기 시작한다. 충분한 증거가 수집되자 왈리스는 이를 BBC로 가지고 가서 2011년 첫 관련 보도가 나오게 한다. 이후 BBC 최고 인기 탐사 전문 프로그램인 '파노라마'가 2015년, 2022년 두 번이나 이 문제를 다루게 된다.

우체국장들을 횡령 혐의로 형사기소한 파울라 베넬스 전 우정청장.  photo   The   Gaurdian



시스템 오류 파헤친 BBC와 우정청의 대결

왈리스는 2022년 11월 그동안의 취재를 집약해 '거대한 우정청 추문 사태: 결백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게 한 수백억 파운드 IT 재앙'이라는 574쪽의 거작을 펴낸다. 왈리스는 이 책을 쓰기 위해 700여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이를 위해 영국 전역을 발로 뛰었다. 그의 책이 결국 이번 미니 시리즈의 스토리를 제공했는데, 왈리스는 드라마 제작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며 거의 작가 역할을 다 했다. 책은 2021년 영국 고등법원이 39명의 우체국장에 대한 유죄판결을 뒤집는 판결을 내리기까지를 다뤘다.

이 사건이 반전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계기는 후지쓰 직원의 증언이었다. 호라이즌 시스템 계정을 원격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이 주목할 만한 증언은 이번 드라마에도 나온다. 드라마에서 우체국장 마이클 러드킨은 자신이 후지쓰 본사를 방문했을 때 당시 후지쓰 직원이 아무 생각 없이 우체국 계좌 조작 장면을 보여주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후지쓰 직원의 증언은 지난 2014년 왈리스와 BBC 프로듀서 팀 로빈슨에 의해 BBC 지역 프로그램인 '인사이드아웃(Inside Out)'에도 소개된다. 이러한 증언이 터져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정청은 끝까지 "우정청, 후지쓰 중 어느 곳에서도 우체국 거래 데이터를 원격으로 편집, 조작 또는 제거할 수 있는 기능이 호라이즌 시스템에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후지쓰 내부고발자는 2015년 BBC '파노라마' 프로그램에 등장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우체국장 모르게 후지쓰 직원들은 우체국 단말기에 접속해 자료를 조작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프로그램이 나간 후 우정청은 즉시 웹사이트에 '계속되는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해 BBC에 항의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내부고발자 보호를 위해 이 후지쓰 직원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고 그의 주장을 다른 언론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이번 드라마가 방영될 때까지 어디에도 이 직원의 증언은 언급되지 않았다. 내부고발자 보호를 위해 신원을 못 밝히는 것을 빌미로 당시 파울라 베넬스 우정청장은 우정청 소유주인 정부 당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BBC 프로그램에는 새로운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다른 미디어로부터도 정보를 거의 받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베넬스는 내부고발자가 제공한 새로운 정보에 대해서는 보고서에 언급하지도 않았다.

후지쓰 직원의 내부고발을 담은 BBC 프로그램은 2019년 3월 우체국 사태 피해자 집단소송인 '미스터 베이츠 대 우정청' 재판에서 첫 승소를 이끌어낸 중대한 근거가 되었다. 후지쓰 직원은고등법원 법정에서도 우체국 컴퓨터 시스템에 버그가 오류를 일으켜 자신들이 원격으로 수정을 하기도 했다는 증언을 했다. 이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후지쓰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우체국에 있지도 않은 영업수입이 현금과의 차이를 발생시켰다는 것이었다.

우체국 사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된 이 집단소송은 BBC '파노라마'를 우연히 본 패트릭 그린 변호사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드라마 '미스터 베이츠 대 우정청'의 주인공인 알란 베이츠에게 자신이 집단소송을 주도해 줄 테니 피해자를 모으라고 제안했다. 당시 그린 변호사는 엄청난 비용 등을 고려해 승소했을 때만 변호비를 받는 조건(conditional fee: No win No fee)을 제안했고 고율의 사례비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결국 승소 후 우정청으로부터 배상받은 5500만파운드(약 935억원) 중 변호사비와 소송 비용 등으로 보상금의 60%인 3300만파운드를 제한 1200만파운드를 555명의 원고인 피해자들이 나누어 가져야 했다. 피해자 1인당 돌아가는 배상금이 겨우 2만1000파운드(약 3570만원)에 불과했다. 드라마에서 보면 승소에 환호작약하던 피해자들이 변호사가 배상 금액을 말하자 자신들이 우정청에 강탈당한 금액에도 못 미친다고 격앙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여주인공인 전직 우체국장이 "이제 우리는 시작"이라고 일갈해서 분위기를 돌린다.



우체국장들의 집단소송 승리를 이끌어내는 데 큰 기여를 한 ‘거대한 우정청 추문 사태: 결백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게 한 수백여 파운드   IT   재앙’의 저자인 탐사보도 작가 닉 왈리스.   photo   cloudsecurityexpo.com



영국 정부 1조7000억원의 보상금 책정



사태가 커지자 영국 정부는 이 변호사비와 소송비용 등을 보상해 줄 계획임을 밝힌 상태다. 일단 7만5000파운드(약 1억2750만원)의 정부 보상이 먼저 지급될 예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재심으로 무죄 결론이 난 95명에게만 이 보상이 해당된다는 점이다. 아직 재심이 진행 중이거나 아예 시작도 안 한 피해자는 보상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정부와 의회는 우체국 사태 유죄판결을 일괄 사면하려는 계획도 논의 중에 있다. 그러나 '전례가 없는 일괄 사면(unprecedented blanket acquittal)' 특별법에 대해 법원의 유·무죄 판단 특권을 의회가 침해하는 꼴이라는 비판도 많다. 법 정의에 어긋나고, 판결을 정치인들이 결정하는 셈이 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현재 영국 정부는 피해자 보상금으로 1차 보상금 7만5000파운드 외에 10억파운드(약 1조7000억원)의 예산을 따로 책정해 놓은 상태다. 4000여명의 피해자들이 일괄 사면으로 무죄 판결을 받으면 정부로부터 1인당 60만파운드의 보상을 받게 된다. 이런 절차에 시간이 걸리니 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우선 중간 보상으로 16만3000파운드(약 2억7700만원)를 지급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나온 상태인데, 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 95명 중 31명만이 이 보상안에 최종 합의했다. 만일 합의가 안 돼 개인적으로 정부 상대 행정소송에 들어가면 100만파운드 이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집중적으로 논의하던 영국 사회는 일단 보상 문제가 가닥을 잡아가자 이제 누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파헤치고 있다. 영국 언론들은 왜 우정청 경영진들은 지금까지 법을 잘 준수하던 4000여명의 우체국장들이 범죄자가 된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는지 묻는다. 또 당시 하원의원이던 제임스 아르버스나트 경 한 명만 빼고는 왜 정치인들도 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조사를 하지 않았는지 추궁하고 있다. 독자들은 왜 주류 언론들도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닫고 있었는지 댓글에서 꾸짖고 있다.

당시 우정청 전 청장 파울라 베넬스가 '미스터 베이츠 대 우정청' 패소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후 2019년 9월 새로 부임한 현 청장은 2023년 8월 "우체국 사태는 절차 및 관리의 실수로 발생한 일이고 사과한다"면서 자신도 우체국 사태 해결의 공으로 받은 모든 상여금을 반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보너스 반환은 영국인들의 동정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받은 보너스는 있지도 않은 시스템상 수치만큼의 현금을 우체국장들로부터 강탈해 가계정에 보관하고 있다가 수년 뒤 영업외이익으로 돌린 덕분에 지급된 것이기 때문이다. 베넬스가 취임한 2013년에는 1억2000만파운드의 적자를 내던 우정청이 우체국 사태가 한창이던 2018년에는 3500만파운드의 흑자로 돌아선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이 이익은 우체국장들이 물어낸 금액과도 연관이 있다.

현재 가장 곤경에 처한 정치인은 현 자민당 당수이자 유럽 유일의 한인촌이 있는 런던 뉴몰든 지역구 하원의원인 에드 데이비 경이다. 그는 우체국 사태가 한창이던 때 보수당과 자민당 연립정부에서 우정청을 관리하는 '고용관계 및 우편업무 담당' 의회 차관이었다. 당시 막 차관 업무를 시작한 데이비 경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해결하지 않은 걸 후회하면서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는 우정청 경영진들의 잘못된 조언을 곧이곧대로 믿은 탓"이라고 사과했다.

또한 후지쓰 유럽법인 대표인 폴 페터슨은 우체국 진상조사위원회 증언에서 "분명 후지쓰는 영국 사회를 실망시켰고, 후지쓰는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후지쓰가 분명히 영국 사회를 실망시켰다"고도 말했다. 그는 지난 1월 19일 재개된 조사위원회 증언에서 사태가 막 시작된 1999년 초 이미 후지쓰는 29개의 버그가 시스템에 있음을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 사실을 부정해 온 것은 '수치스럽고 끔찍한 일(shameful and appalling)'이라고 솔직하게 증언했다. 드라마가 던진 후폭풍이 워낙 거세 진정성 있는 정면돌파식 사과를 한 것이다.

문제는 영국 내의 여론이 악화되어도 후지쓰에 직접 법적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영국법에는 청구인이 상황을 알고 나서 6년 내에 보상을 청구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그 기간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우정청이 시스템의 오류를 알고 나서도 10년 이상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지쓰가 면책이 된 것이다. 영국 정부가 후지쓰에 보상을 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데 영국 정부의 곤혹스러움이 있다. 후지쓰의 팔을 비틀어 만족할 만한 배상을 받아내려고 하다가 후지쓰가 반발을 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자살과 이혼… 삶이 파괴된 사람들

이제 그럼 왜 우정청이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우체국장들을 몰아붙였는지 의문이 남는다. 심지어 임신 중인데도 갑자기 집에서 연행해 가는 등 치욕적인 중범죄자 취급을 받은 우체국장들도 있었다. 이들 중 4명이 스트레스 끝에 자살했고 수백 명이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또 이혼과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사례들도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우정청은 우체국장들을 상대로 시스템상에만 존재하는 현금 회수 목표를 설정하고 수금 완수를 압박했다. 목표를 달성한 직원에게는 상여금을 지불하는 등 성취동기까지 부여했다. 감사 담당 직원들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회유와 위협, 심지어는 있지도 않은 법조항을 들먹이면서 투옥을 운운하기까지 했다. 무지한 시골 우체국장과 직원들을 협박한 것이다. 일단 유죄를 시인하면 감옥에 안 간다고 회유해서 자인서에 서명하게 했다. 그러나 그 자인서를 근거로 우정청은 우체국장들을 직접 기소했다. 부족한 현금을 물어내고도 감옥에 가게 만든 것이다. 진짜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셈이다.

문제는 일부 전문가와 고위 임원들, 시스템 개발 기술자들 말고는 현금 부족액이 실제 존재하지 않은 시스템상의 부족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정청 내의 누구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특히 현금 회수 압박을 받던 담당 직원이나 현장에서 우체국장들을 쥐어짠 조사요원들은 진실을 모르고 실제 우체국장들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굳게 믿었다. 우체국장들을 몰아세워 돈을 회수하는 일이 회사를 위해서 옳은 일이고 정의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래서 우체국장들이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하면 파렴치한 위선자라고 여겼다고 당시 조사관을 역임한 직원은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증언했다.

베넬스는 재임 중 줄기차게 자신들의 시스템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고 이 모든 금액 차이는 개별 우체국장들의 잘못이나 횡령으로 인한 문제라고 주장했었다. 자신도 진실을재판 전까지는 몰랐다고도 증언했다. ITV 드라마에서 베넬스는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해에는 전혀 관심 없는 전형적인 이중 성격의 인물로 묘사된다. 놀랍게도 그녀는 신품을 받은 성공회 신부이고 현재도 성직을 수행하고 있다.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여성도 사제가 될 수 있다. 베넬스는 2019년 엘리자베스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지휘관 훈장(CBE)도 수훈했다. 이번 드라마가 방영되자 그녀의 훈장 박탈 청원 서명 운동이 벌어져 1주일 사이에 100만명이 참여하는 일이 벌어졌다. 베넬스는 리시 수낵 총리마저 서훈 박탈을 고려하겠다고 하자 비로소 사임했다.

'영국 역사상 가장 큰 오심(the biggest miscarriage of justice in UK history)'이 벌어졌는데도 25년간 꼼짝도 안하던 영국의 양심이 드라마가 방영되고 나서야 드디어 움직인다는 질타의 탄식이 영국 여기저기서 들린다. 판도라 상자가 열리기 전부터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영국 정치계와 언론계가 타조처럼 모래에 머리를 묻고 없는 척했다는 사실에 수치를 느껴야 한다는 자책이다. 어떻게 영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고,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는 댓글도 엄청나게 많다. 가디언지는 '관료주의적인 잔혹성과 타성이 만들어 낸 사태(story of bureaucratic cruelty and inertia)'라고 이 사건의 본질을 평했다. 또 '인간들이 컴퓨터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라고도 했다.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에 희생된 무력한 소시민들의 비극을 둘러싼 진실이 영원히 묻히지 않고 결국 정의가 실현되긴 했다. 이는 영국인 특유의 집념, 집착, 집중을 지닌 몇 명의 영웅이 수십 년간 자신의 삶을 희생한 덕분이라는 사실에 또 다른 감동을 받는다.

 

 

출처: 주간 조선<네이버 뉴스>

퍼온 날짜: 2024년2월 18일 21:45분

 

최초 저작기사 원문 작성자:권석하 통신원 johankw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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