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기심

계백(階伯) 그는 무엇을 위해 죽었을까?

by 신기황 2024. 1. 6.
728x90

<삼국사기 열전(列傳)>

계백(階伯)은 백제인이다. 벼슬하여 달솔(達率)이 되었다. 당나라의 현경(顯慶) 5년 경신에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병 5천명을 뽑아 대항하면서 말하였다.........중략

드디어 가족을 모두 죽였다. 황산의 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의 군사를 맞아 싸울 때 뭇 사람에게 맹서하였다...........중략

드디어 힘을 다하여 싸우니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냈다. 신라 군사가 이에 물러났다. 이처럼 진퇴를 네 번이나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죽었다............중략

백제의 멸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계백(階伯)이라는 인물의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백(階伯)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문헌기록의 부족에 기인한다. 문헌기록이 상세하지 않지만 계백(階伯)에 대해 동명(東明) 나름대로 좀더 짚어 보기로 한다.

문헌기록에서 우리가 유추 할수 있는 것은 계백(階伯)이 백제인이며, 벼슬이 달솔(達率)이라는 것과 (서기 660년) 신라의 침공시 황산(黃山)벌에서 장렬히 싸우다 죽었다는 정도이다. 여기서 계백(階伯)이라는 인물을 그나마 알수있는 단서는 관직이 달솔(達率)이라는 것이다. 백제는 고이왕(古爾王)때, 관등체계를 정립 하였다. 아래 그 대강을 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내신좌평(內臣佐平)은 왕명 출납(宣納), 내두좌평(內頭佐平)은 창고와 재정,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법과 의례,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왕궁을 지키는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벌과 감옥,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다.

또 달솔(達率)· 은솔(恩率)· 덕솔(德率)· 한솔(?率)· 나솔(奈率) 및 장덕(將德)· 시덕(施德)· 고덕(固德)· 계덕(季德)· 대덕(對德)· 문독(文督)·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克虞)를 두었다. 6좌평은 모두 1품이요,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달솔(達率)이라는 관직은 좌평(佐平) 바로 아래로 높은 품계이다. 계백(階伯)의 관직이 달솔(達率)이라 하였으니, 조정(朝政)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다졌다고 보아야한다. 그런데 이렇듯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기록 어디를 찾아보아도 그의 행보가 보이질 않는다.

고이왕(古爾王)이 관등체계를 정립한 이후, 좌평(佐平)중에는 왕명 출납(宣納)을 담당하는 내신좌평(內臣佐平)과 지방의 군사를 담당하는 병관좌평(兵官佐平)을 중요시 하였다. 백제의 모든 정사(政事)는 좌평(佐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후 (서기 390년) 진사왕(辰斯王)때, 고구려 도곤성(都坤城)을 함락시킨 공로(功勞)로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이로 미루어 당시 달솔(達率)은 문신(文臣)이라기 보다는 무신(武臣)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고이왕(古爾王)부터 아신왕(阿莘王)때까지 진씨(眞氏)가 조정(朝政)의 주요관직을 장악하였다. 그러다가 전지왕(?支王)때, 서제(庶弟) 여신(餘信)을 상좌평(上佐平)으로 삼고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또한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 해충(解忠)을 달솔(達率)로 삼았다. 이로써 진씨(眞氏)들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해씨(解氏)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서기 478년)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문주왕(文周王)을 죽이는 대역사건이 일어난다. 해구(解仇) 반란의 뒤에는 고구려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서기 477년) 문주왕(文周王)이 자신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는데, 5월에 검은 용(龍)이 웅진(熊津)에 나타난 이후 7월에 내신좌평(內臣佐平) 곤지(昆支)가 죽었다. 여기서 검은 용(龍)이란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반란의 동조자인 제3품인 은솔(恩率) 연신(燕信)이 고구려로 도망간점을 그 이유로 보기 때문이다.

해구(解仇) 반란은 좌평(佐平) 진남(眞男)과 덕솔(德率) 진로(眞老)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로써 해씨(解氏)들의 세상은 끝이나고, 또 다시 진씨(眞氏)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성왕(聖王)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공격이 심해졌다. (서기 529년) 고구려 안장왕(安藏王)이 공격할 때, 좌평(佐平) 연모(燕謨)가 맞서 싸웠으나 대패하였다. 이에 성왕(聖王)은 왕도(王都)를 사비(泗?)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사비(泗?)로 천도 이후에 장군 연회(燕會), 한솔(?率) 연문진(燕文進)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때, 연씨(燕氏)들의 연고지로 추측된다. 그리고 무왕(武王)때 좌평(佐平)을 선봉장으로 하여 전쟁에 패배한 후에 군사 편제를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 616년)에 달솔(達率) 백기(?奇)로 하여금 신라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한 것이나, (서기 627년)에 장군 사걸(沙乞)이 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볼때, 여러 방면에서 전투를 치룰수 있도록 병관좌평(兵官佐平) 휘하에 각각의 소부대로 군사편제를 바꾸었다고 본다.

무왕(武王)은 웅진(熊津)을 대 신라 공격의 전초기지로 생각하여 사비(泗?)와 웅진(熊津)을 오고가며 진두지휘 하였다. 그러다가 (서기 632년)에 무왕(武王)은 의자(義慈)를 태자(太子)로 책봉하여 모든 군사와 정무를 맡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기 641년) 의자(義慈)가 제위(帝位)에 올랐다. 이듬해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주군(州郡)을 순행하면서 위무하였고, 7월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미후성(??城) 등 40여 성을 함락시킨다. 또한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이때에 계백(階伯)이 윤충(允忠) 휘하에 있으면서 대야성(大耶城) 공격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문헌기록에 계백(階伯)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장군의 반열에 아직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백(階伯)은 이후 각종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戰功)을 세우면서 드디어 장군에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백제의 중앙군은 여전히 왕족계열의 장수가 득세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의직(義直)이다. 의자왕(義慈王)의 친척으로 추정된다. 신라를 거세게 몰아 부치지만 여의치 않았던 의자왕(義慈王)은 (서기 653년) 왜(倭)와 우호를 통하여 반전의 기회로 삼는다.

그런데 갑자기 의자왕(義慈王)은 사치와 향략에 빠지고 만다. 그 이유는 자세하지 않지만, 왕실문제인것 만큼은 틀림없다. 이로인해 조정(朝政)은 혼란에 빠지고, 신라에 맞서 싸워야할 군부는 오합지졸이 되어갔다. 결국 의자왕(義慈王)은 바른말을 했다고 좌평(佐平) 성충(成忠)을 옥(獄)에 가두어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자신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佐平)으로 삼는다. 백제의 멸망이 서서히 다가오는 가운데 여러 군부의 장수들은 출신 지역으로 내려가 자기지역의 성(城)을 수비하는데 급급하였다. 백제 멸망후 부흥군들이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한 것을 볼때, 군부의 장수들이 이러한 행보를 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때 계백(階伯)은 왕도(王都)를 지키는 몇 안되는 장수로서 신라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을 공격하여 공(功)을 세우기도 하였다. 드디어 (서기 660년) 당(唐)나라와 신라는 백제를 총 공격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의자왕(義慈王)은 어떤 전술로 싸울지에 대해 신하(臣下)들에게 물어본다.

좌평(佐平) 의직(義直)은 당(唐)나라 군사를 먼저 선제공격 하자고 했으며,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선제공격 하는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신하(臣下)들의 의견이 상충되자,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던 좌평(佐平) 흥수(興首)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이에 흥수(興首)는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방어막으로 삼아 당(唐)나라 군사와 신라군을 막을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흥수(興首)를 미워하는 대신들은 의자왕(義慈王)에게 그 계책을 따르지 말자고 한다.

이렇듯 백제 조정(朝政)이 우왕좌왕 하는 동안 신라군은 이미 탄현(炭峴)을 지나고 있었다.

의자왕(義慈王)은 마지막까지 왕도(王都)를 지키고 있었던 계백(階伯)에게 달솔(達率)의 관직을 제수하고 결사대를 만들것을 명령한다.

이에 계백(階伯)은 결사대 5천명을 이끌고 황산(黃山)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은 계백(階伯)이 죽을때까지 홀로 싸웠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 계백(階伯)이 죽었을때, 좌평(佐平)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하였으니, 이들은 분명 구원군 이었을 것이다. 계백(階伯)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동사강목(東史綱目)의 구절로 마무리 한다.

 

“백제가 망할 것은 어리석은 사람도 다 알았다. 계백은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을 알고서도 그 몸을 아끼지 않았거늘, 하물며 그 처자를 아꼈겠는가? 삼국(三國) 때에 충신과 의사(義士)가 물론 많았지만, 사전(史傳)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마땅히 계백으로 으뜸을 삼아야 할 것이다.”

728x90